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노지의 변 (문단 편집) ==== 도쿠가와 이에야스 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흑막이었다는 설. 이 설은 흑막설 중에선 비교적 정황 증거가 많다. 미츠히데가 히데요시에게 토벌되어 죽은 게 아니라 도망쳐서 이후 이에야스의 치세에 중요한 역할을 한 승려 [[난코보 텐카이]], 즉 텐카이가 되었다는 설과 결부되어 논의된다. 자신을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역사학자 아케치 켄자부로(明智憲三郎, 1947~)[* 본인에 의하면 미츠히데가 죽은 후 성을 아케타(明田)로 바꿨으나, 증조부 대에 [[메이지 유신]] 이후 족보를 찾아 정부에 자신이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이라 주장하여 다시 아케치 성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켄자부로가 실제 아케치 미츠히데의 후손인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성을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족보 역시 [[관동대지진]] 때 미츠히데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게이오기주쿠대학]] [[공학부]] 출신이며 [[난코보 텐카이]]와 미츠히데가 동일인물이란 설을 제기한 아케치 타키로(明智滝郎)가 이 사람의 조부다.]가 주장하는 설로, 굳이 따지자면 이 설에 위 히데요시 배후설이 섞인 것에 가깝다. 이 사람의 주장으로는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 후 [[명나라]] 원정(唐入り)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변을 일으켰다는 것. 변을 일으킨 결정적인 방아쇠는 주고쿠 지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노부나가가 이에야스 암살 작전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가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었고, 이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변이 터지자마자 회군하는 바람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결과적으로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혼노지의 변 직전인 5월 15일, 미츠히데는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과정에서 물고기가 썩는 사태가 벌어졌고 노부나가는 미츠히데를 심하게 질책하며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임무에서 해제했다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기록되었다. 이에야스 흑막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노부나가가 심하게 질책한 이유는 물고기가 썩어서가 아니라, 실은 미츠히데에게 이에야스를 은밀히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지만 미츠히데가 수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수행을 거부해서 분노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흔히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의형제를 맺은 동맹 사이로 알려졌지만, 실은 노부나가에게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와 다케다를 견제하기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고 이들은 본다. 그래서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게 되자 노부나가는 '이제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 이에야스를 완전히 복속시켜 [[가신]]으로 만들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멸망시킬 것인가.'하는 선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도 이런 노부나가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츠히데와 공모해 노부나가를 암살하게 된 것이 혼노지의 변이라는 게 이 설의 핵심. 어느정도 정황적으로 봤을 때 이에야스로선 노부나가가 일본을 통일한 이후의 상황을 장담하기 힘들었던 것일 수도 있고, 노부나가의 살의를 눈치챈 이에야스가 먼저 선수를 치려했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아케치의 병사들은 혼노지를 치는 것이 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노부나가를 노린 게 아니라 이에야스를 노린 게 아닐까."라고 했다는 기록이나, "노인잡담"이라는 책에서 "아케치가 난을 일으켰을 때 이에야스는 이것이 노부나가가 틈을 보아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에야스의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보기는 다소 애매하다. 비록 다케다를 복속시켜 영지를 편입해도 동쪽에는 이마가와 잔당과 [[호조 우지야스]]가 구축한 판도를 물려받은 [[호조 우지마사]]의 [[후호조씨]]세력이 있었고, 북쪽에는 우에스기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주고쿠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보내 모리와 일전을 치르고 있었다. 호조나 우에스기나 강성한 세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동쪽을 막아줄 수 있는 이에야스의 이용가치가 여기서 주장하는 대로 적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로 인해 부인 [[츠키야마도노]]와 장남 [[마츠다이라 노부야스]]를 잃은 원한을 풀려했다는 설도 있다. 미츠히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츠히데의 가신인 [[사이토 토시미츠]]의 딸인 [[사이토 후쿠]][* 후의 [[카스가노츠보네]]]를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로 천거했다는 점에서 양측간에 뭔가 오고가는 것이 있지 않았겠는가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이 처단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보다 연상에 친 이마가와라는 뒷배가 있어서 이마가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적어도 이에야스 본인은 이마가와 밑에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후 바로 자기 영지로 튄 데다가 이마가와의 가장 큰 적이자 요시모토를 죽인 오다 노부나가와 바로 손을 잡았기 때문. 상술했다시피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을 빌어 이에야스 본인이 숙청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많고 거기에는 충분한 인과관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이에야스가 과연 이런 모험을 감수하려고 했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후쿠를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로 천거한 것은 미츠히데가 아니라 교토의 치안을 맡았단 [[이타쿠라 가츠시게]]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츠히데와 이에야스가 관계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에야스가 흑막이었다면 왜 히데요시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에 나서지 않았겠는가 하는 점 또한 이 설의 약점이다. 당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보다 먼저 앞서서 행동에 나서기는커녕 [[이가]] 닌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망쳤기 때문이다. 음모론에서는 그래서 누가 득을 보았느냐라고 따지면, 결국 오다 노부나가의 구 영지였던 [[카이]], [[시나노]] 지역은[* 시나노 북쪽 지역의 [[사나다 마사유키]]를 제외.] 이에야스의 영토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